<채식주의자> 데보라 스미스의 번역은 재평가 받아야 한다
[윤선경 기자]
한림원은 상흔의 서사에 천착하는 한강의 글을 두고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는 동시에 인간 생명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평가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노벨 문학상 심사위원들이 한국어를 모른다는 점이다. 그들이 읽은 것은 한강의 번역된 소설들이다. 따라서 번역을 누가, 어떻게 하느냐는 번역의 운명에, 나아가 원본의 운명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데보라 스미스의 번역 < The Vegetarian >은 한때 국내에서 오역 논쟁으로 곤욕을 치러야 했다. 많은 학자들이 오역을 지적하면서 원본을 왜곡하고 한국문학을 배신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는 유일하게 그의 번역이 한국어 원본의 주제의식, 페미니즘을 잘 살리고 부각시켰다고 주장하는 논문을 썼다. 그래서 데보라 스미스의 평판은 오랜 무명에서 한국문학을 구원한 영웅이냐, 한국문학을 배신한 반역자이냐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었다.
이러한 논란은 한국에서 통용되는 번역의 개념 및 위상과 관련이 깊다. 한국은 영미권에 비해 원본중심주의, 직역의 풍토가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학번역을 얘기할 때, 오역을 했는지 안 했는지, 충실한지 아닌지, 정확한지 아닌지에 초점을 맞춘다.
두 언어, 문화가 다르고 두 언어 글쓰기 관행이 다를 진데, 한국어에서 좋은 글쓰기의 기준이 다른 언어에서는 통하지 않을 수 있음을 간과한다. 우리의 감동이 그들의 감동이 아닐 수 있음을 놓친다.
기억해야 할 것은 해외 심사위원들과 독자들은 원본과 번역을 비교해서 읽지 않으며, 번역을 하나의 시로, 소설로, 작품으로 읽는다는 사실이다. 오로지 그들의 언어로.
한강의 소설을 영어로 옮긴 데보라 스미스는 훌륭한 한국문학 작품을 영어로 번역한다면, 번역은 훌륭한 영문학 작품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번역가는 단어나 문법에 대한 충실성보다는, 더 넓은 의미의 충실성, 즉 원본의 예술성과 작품성, 원본을 읽는 독자의 읽기 경험에 대한 충실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학번역은 ‘문학적’이어야 하고, 번역가는 단순히 언어적 지식보다는 문학적 감수성과 글쓰기 역량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데보라 스미스는 단어를 선택할 때, 그 단어가 얼마나 많은 음절이 있는지, 어떻게 보이는지 느껴지는지 들리는지를 생각하고, 어떤 종류의 함축과 이미지들을 독자에게 불러 일으킬지와 같은 것들을 고민한다고 말한다.
한국어 원본의 서사를 번역가가 충분히 이해하고 뛰어난 문장과 문체로 도착어권에서 인정받는 ‘문학작품’으로 창조해 낼 수 있을 때, 비로소 한국문학은 이 땅을 넘어서 전 세계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번역은 문학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통번역학부 교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