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SF 앞에 놓인 가장 탄탄한 디딤돌 [새로 나온 책]
정소연 지음, 래빗홀 펴냄
“언제나, 누군가는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2005년 데뷔작 〈우주류〉부터 2021년 작 〈교실 맨 앞줄〉까지 SF 작가 정소연이 지난 20년간 ‘천천히’ 써온 작품 14편이 담긴 소설집이 출간됐다(나머지 14편은 〈미정의 상자〉로 2025년 출간 예정). 정소연은 “삶은 외롭고 용기는 드물고 선의는 귀하여, 삶에서 이야기를 건져 올리기가 쉽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어렵게 우리에게 도착한 이야기는 ‘한국 SF 앞에 놓인 가장 탄탄한 디딤돌(배명훈)’이자 ‘SF를 읽고 쓰기 시작했을 때 나침반 삼아 나아간(김초엽)’ 존재가 되었다. 낡지 않는 이야기 사이를 헤매다 보면 “향냄새가 나고, 신발이 나뒹굴고, 입과 코를 가리고 뛰어야 하는 세계로 나아가겠다”라고 기어이 다짐하게 된다.
남종영 지음, 곰출판 펴냄
“고래가 앞으로의 인간-자연, 인간-동물 관계를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이다.”
15세기 스페인의 바스크족이 상업적 목적으로 고래를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고래가 점점 사라져가자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는 상업 포경을 금지한다. 대략 500년 만에 상업 포경의 시대가 저물었다. 환경운동가·과학자 등은 경제적 자원으로 격하돼 대량으로 살육되고 감금됐던 고래의 현실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냈다. 고래를 평화·환경을 지키는 ‘다정한 거인’ 혹은 ‘권리의 주체’로 인식하는 흐름이 생겨났다. 기자 생활을 오래한 환경 논픽션 작가가 고래와 인간 사이의 역사를 다루었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세계에 흩어져 있는 ‘고래 현장’을 20년 가까이 취재했고, 논문·보고서 등 200여 편을 검토했다. 돌고래 해방운동 등 고래와 관련한 한국 상황도 담았다.
한분영 외 지음, 안철흥 옮김, 글항아리 펴냄
“해외 입양인으로서의 삶은 이중성으로 가득합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해외로 입양된 이들이 쓴 에세이다.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미국, 벨기에 등으로 입양된 35명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입양은 입양 부모, 친생 부모, 배우자, 자녀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책에는 그들의 입장에서 바라본 입양 이야기도 담겨 있다. 저자들은 성인이 된 후 연고가 없는 한국을 방문해 입양 기록 등을 찾아나선다. 이야기마다 반복되는 문구가 있다. ‘입양 동의서나 경찰 신고서가 입양 서류에 포함되지 않았다.’ 모두 불법 입양이었던 것이다. 해외 입양은 정체성 등 극심한 혼란을 겪게 하고 인종차별에 노출시킨다. 입양인들은 어두운 내면을 드러낸다. 현재 자기 삶의 제자리를 찾기 위해 과거 이야기를 풀어냈다.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김영사 펴냄
“자유로운 정보 시장에서는 진실보다 분노가 우세할 가능성이 높다.”
글로벌 베스트셀러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가 ‘정보의 흐름’이라는 관점으로 역사를 재해석하며 AI(인공지능)에 대한 경계심을 촉구한다. 그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모든 대규모 사회는 ‘정보 네트워크’였다. 또한 이 네트워크를 성립시키는 ‘정보 기술’로 이야기(네트워크를 결속), 문서(네트워크에 질서를 부여), ‘거룩한 책(질서를 정당화)’ 등이 활용되어왔다고 한다. 문제는, 오늘날의 ‘정보기술’인 컴퓨터와 AI가 정보 네트워크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면서 미증유의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야기나 문서 같은 정보기술과 달리 AI는 스스로 결정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성할 수 있는 능동적‧주체적 행위자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인류와 ‘진실’ 그리고 민주주의를 지키려면 AI 개발·활용을 강력히 규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에드워드 토머스 지음, 윤준 옮김, 봄날의책 펴냄
“그때가 되어서야 내 여행도 끝나리라.”
영국 시인 에드워드 토머스의 시선집이다. 그는 날씨에 관해 이야기하는 대신 날씨를 ‘살았던’ 시인이라 불렸다. 교과서 수록작이기도 한 시 ‘가지 않은 길’을 쓴 미국 작가 로버트 프로스트와 교류하며 ‘예술적 동반자’로 알려졌는데, 그 표현만으로 그를 설명하는 건 못내 아쉬운 일이다. 모국을 향한 존경과 애정, 그 땅에 뿌리 내린 자연의 생동감은 시인의 작품 세계를 이루는 핵심 재료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생명의 발소리와/ 친목과 투쟁 대신/ 풀들만 자라는(‘가고, 또다시 가고’)” 전쟁의 고통과 허무에 대해 주로 썼다. 당시 입대 후 해외 파병 근무를 하던 그는 자신의 시집이 발간되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하고 전사했다.
김재형 외 지음, 돌베개 펴냄
“한국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차별의 한 양태를 밝히고 문제 삼으려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우생학이라는 낱말은 나쁜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 각론은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고, 미래다. ‘낙태죄’ 폐지 논란과 무관하게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사람들의 임신중절은 허용되어 왔다. 유전공학 발전을 논할 때면 ‘맞춤 아기’에 대한 상상이 빠지지 않는다. 100여 년 전 한국에 상륙한 우생학은 모습을 바꿔가며 명맥을 이어왔다. 의학, 사학, 국문학 등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이 한국 근현대사를 우생학이라는 프레임으로 되짚었다. 1910년대 ‘민족개조론’부터 오늘날 혼혈인에 대한 차별까지 다양한 문제를 다룬다. 서문에서 “탈우생 사회라는 처방에 앞서 필요한 것은 우리가 왜 우생 사회를 살게 되었는지에 대한 진단”이라고 적었다.